병원 간판에는 슬로건을 못 넣습니다 — 의료법이 허락한 여덟 칸, 브랜딩이 되는 한 칸
간판은 광고판이 아니라 의료법이 표시 항목까지 정해둔 표시판입니다. 병원 간판에 넣을 수 있는 여덟 가지와 2023년에 바뀐 글자 크기 규정, 그 안에서 브랜딩이 가능한 유일한 칸을 정리했습니다.
한결
병원 브랜딩 마케터

이 글의 순서 7
개원을 앞둔 원장님과 간판 시안을 놓고 마주 앉은 날이었습니다. 원장님이 도면 아래쪽 빈자리를 짚으며 말씀하셨어요. "여기 우리 한 줄 넣어주세요. '끝까지 책임지는 진료'로요."
저는 잠깐 망설이다 말씀드렸습니다. "원장님, 그 문장은 간판에 못 넣습니다." 표정이 굳으시더군요. 내 돈 들여 내 병원 앞에 다는 간판인데 왜 안 되냐는 얼굴이셨습니다.
간판 견적서에는 아크릴이냐 채널이냐, 몇 자에 얼마인지가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거기에 무슨 글자를 넣을 수 있는지 알려주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그건 업체 일이 아니라 원장님 일이거든요.
간판은 광고판이 아니라 '명칭표시판'입니다
의료법은 병원 간판을 광고물이 아니라 명칭표시판으로 봅니다. 그리고 시행규칙 제40조 제6호는 여기에 "다음 각 목의 사항만을 표시할 수 있다"고 못 박아 뒀습니다. 넣지 말라는 걸 나열한 게 아니라, 넣어도 되는 것만 여덟 개 적어둔 방식이에요.
- 의료기관의 명칭 및 로고
- 전화번호 및 주소 (홈페이지 주소 포함)
- 진료에 종사하는 의료인의 면허 종류 및 성명
- 상급종합병원으로 지정받은 사실 (지정받은 곳만)
- 전문병원으로 지정받은 사실 (지정받은 곳만)
- 개설자가 전문의인 경우 그 전문의 자격 및 전문과목
- 의료기관 인증을 받은 사실
- 진료시간 및 진료일
목록에 없는 건 못 넣습니다. 주차 안내도, 비급여 진료비도, 그리고 원장님이 넣고 싶어 하셨던 슬로건도요. 참고로 로고가 이 목록에 들어온 건 2024년 7월, 진료시간과 진료일이 들어온 건 2023년 9월 개정 때입니다. 생각보다 최근에 열린 칸이에요.
어기면 곧바로 벌금이 날아오지는 않습니다. 1차는 시정명령이고, 그 시정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업무정지 15일로 이어집니다. 무서운 건 처분 자체보다 이미 달아버린 간판을 다시 떼는 비용이죠.
2023년에 바뀐 글자 크기, 아직 옛날 규정으로 안내하는 곳이 많습니다
여기가 제일 자주 틀리는 지점입니다. 검색해서 나오는 글 상당수가 아직 개정 전 규정을 그대로 싣고 있어요.
시행규칙 제40조 제1호의 현행 문언은 이렇습니다. "의료기관의 종류 명칭의 글자 크기는 고유명칭의 2분의 1 범위에서 크거나 작게" 한다. 쉽게 말해 '연세'가 고유명칭이고 '치과의원'이 종류 명칭이라면, 둘의 크기를 어느 정도 다르게 가져갈 여지가 생긴 겁니다.
2023년 9월 22일 공포된 개정 전까지는 문구가 달랐습니다. 개정 전에는 "고유명칭은 의료기관의 종류 명칭과 동일한 크기로" 해야 했어요. 지금도 "무조건 같은 크기여야 한다"고 안내하는 블로그가 많은데, 그건 3년 가까이 지난 규정입니다.
다만 두 가지는 조심하시는 게 좋습니다. '0.5배에서 1.5배까지'라는 설명은 조문에 그대로 적힌 표현이 아니라 해석입니다. 그리고 정확히 똑같은 크기가 허용되는지를 두고는 해석이 갈립니다. 시안이 확정되기 전에 관할 보건소에 한 번 물어보시는 편이 안전합니다.
진료과목은 원래 간판에 넣는 게 아닙니다
이것도 오해가 많습니다. 원칙은 명칭표시판과 진료과목 표시판을 따로 두는 것이에요. 진료과목 표시판에는 "진료과목"이라는 글자와 함께 과목명을 적습니다.
간판 하나에 몰아 쓰는 건 예외입니다. 장소가 좁거나 그 밖에 부득이한 사유가 있을 때만 명칭표시판에 진료과목을 함께 표시할 수 있고, 이때는 시행규칙 제42조에 따라 진료과목 글자를 의료기관 명칭 글자 크기의 2분의 1 이내로 줄여야 합니다.
앞 문단의 '2분의 1'과 헷갈리기 쉬운데 완전히 다른 규정입니다. 하나는 고유명칭과 종류 명칭 사이의 비율이고, 이건 명칭과 진료과목 사이의 상한이에요. 근거 조문도 제40조와 제42조로 다릅니다. 법무법인 해설 중에도 이 둘을 섞어 쓴 것이 있으니, 업체가 가져온 근거를 그대로 믿지 마시고 조문 번호를 확인하시는 게 좋습니다.
하나 더. 표시할 수 있는 과목은 시설과 장비, 인력을 실제로 갖춘 과목뿐입니다.
전문의냐 아니냐가 이름의 구조를 바꿉니다
같은 소아 진료를 봐도 간판에 쓸 수 있는 이름이 다릅니다.
개설자가 해당 과목 전문의라면 고유명칭과 종류 명칭 사이에 전문과목을 끼워 넣을 수 있습니다. '홍길동소아청소년과의원'이 되는 거죠. 고유명칭 앞에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를 붙이는 방식도 됩니다.
전문의가 아니라면 이 특례가 없습니다. 이름은 '홍길동의원'이어야 하고, 과목은 별도의 진료과목 표시판에 "진료과목 소아청소년과"처럼 적어야 합니다. 간판만 보면 사소한 차이 같지만, 환자가 받는 인상은 꽤 다릅니다. 이 경계를 넘어서서 전문의처럼 보이게 만든 간판이 실제로 자주 적발되는 유형이고요. 비슷한 결의 이야기를 대표 시술 포지셔닝 글에서도 다뤘습니다.
간판은 사전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 LED만 아니라면
의료광고 사전심의를 받아야 하는 매체는 의료법 제57조 제1항에 다섯 가지로 정해져 있습니다. 신문·정기간행물, 옥외광고물 중 현수막·벽보·전단과 교통시설·교통수단 표시물, 전광판, 대통령령이 정하는 인터넷 매체, 그리고 이용자 수가 큰 SNS. 이 목록에 '간판'은 없습니다.
그래서 통상의 간판은 심의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여기서 한 번 더 갈립니다. LED나 LCD로 만든 전광판형 간판, 바깥을 향해 설치한 디지털 사이니지는 형태가 간판이어도 '전광판'으로 분류되어 심의 대상입니다. 개원 이벤트에 흔히 쓰는 현수막과 배너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심의를 안 받는 것과 규제를 안 받는 것은 다른 말입니다. 의료법 제56조는 간판을 의료광고의 하나로 정의하고 있어서, 거짓·과장·비교·비방을 금지하는 조항은 간판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표현의 선이 헷갈리실 땐 의료광고법 가이드를 함께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간판에서 브랜딩이 되는 칸은 하나뿐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결론이 선명해집니다. 전화번호도 주소도 진료시간도 정해진 정보고, 종류 명칭은 법이 정한 단어입니다. 원장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칸은 고유명칭 하나뿐이에요.
그래서 저는 간판 상담을 이름 이야기로 바꿉니다. 병원 이름은 개원 서류에 적을 칸이 아니라, 간판에서 유일하게 남은 브랜딩 지면이거든요. 지역명을 넣을지 원장님 성함을 넣을지, 진료 영역을 연상시킬지, 발음했을 때 검색창에 그대로 칠 수 있는지. 이걸 정하는 게 곧 간판 전략입니다.
그리고 넣지 못한 슬로건은 버리는 게 아니라 옮기는 겁니다. 홈페이지 첫 화면, 플레이스 소개글, 데스크 앞 안내판, 초진기록지 상단으로요. 우리 병원의 한 문장을 뽑아두면 이 접점들이 한 번에 정렬됩니다. 간판이 열어준 문 안쪽에서 그 문장이 이어지는 방식은 원내 브랜딩 글에 정리해 뒀습니다.
정리
개원 마케팅 순서에서 "간판 문구까지 매번 감으로 정하게 된다"고 적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감을 걷어내는 순서는 이렇습니다.
- 간판은 광고판이 아니라 여덟 개 항목만 허용된 명칭표시판입니다. 슬로건·주차 안내·비급여 가격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 글자 크기 규정은 2023년 9월에 바뀌었습니다. '동일한 크기'로 안내받으셨다면 옛 규정입니다.
-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칸은 이름 하나뿐이니, 간판 견적보다 이름을 먼저 정하셔야 합니다.
간판은 대부분 한 번 달면 몇 년을 갑니다. 업체가 재질과 단가를 정리해 오는 동안, 원장님은 그 위에 올라갈 이름을 정하고 계시면 됩니다. 순서만 지켜도 떼었다 다시 다는 일은 없습니다.
참고로 간판은 심의 대상이 아니지만 현수막·전단·전광판은 대상입니다. 어떤 매체가 걸리고 신청은 어떻게 하는지는 의료광고 심의 신청 가이드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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